루체른 호수 위에 머문 알프스의 시간

루체른
호수 위에 머문 알프스의 시간





루체른
호수 위에 머문 알프스의 시간


마터호른과 작별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알프스의 깊은 산골을 내려와 도착한 루체른은 또 다른 얼굴의 스위스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마터호른을 뒤로하고

마터호른과의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시 체르마트를 떠나 테쉬로 돌아왔다. 알프스 산골마을에서 하룻밤을 더 묵으며 여행의 여운을 천천히 마음에 담았다.

저녁은 이미 체르마트에서 먹고 돌아왔기에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하루 종일 알프스를 오르내리며 쌓인 피로는 생각보다 컸다. 짐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침대에 몸을 눕히자 깊은 잠이 찾아왔다.

다음 날 새벽 네 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눈을 떠 서둘러 짐을 챙겼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알프스를 내려갈 준비를 했다.

다시 내려가는 산길

테쉬로 올라올 때 창밖으로 펼쳐졌던 아찔한 절벽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반대편 좌석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한 뒤 한동안은 가까운 절벽을 바라보지 않았다. 먼 산만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라 산길은 더욱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틀 동안 테쉬에 머물며 알프스의 품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는 이 버스를 타고 내려올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터호른을 직접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올라갈 때와 달랐다. 알프스가 주었던 평안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두려움보다는 담담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함께 여행하던 대부분의 일행은 새벽잠에 빠져 있었다. 험준한 산길도 모른 채 고요히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홀로 깨어 있었다.

버스를 운전하는 폴란드 기사님을 위해 조용히 기도했다. 좁고 굽이진 산길을 안전하게 달려 주시기를, 우리 모두를 무사히 평지까지 데려다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다시 만난 스위스의 평원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산길이 끝나자 창밖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파른 절벽 대신 넓은 들판이 나타났고, 작은 마을과 초원이 이어지는 평화로운 스위스의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창밖에는 그림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 이어졌다고 한다. 잠들어 있던 다른 일행은 하나둘 깨어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지만, 나는 짧은 단잠에 빠져 그 아름다운 시간을 조금 놓치고 말았다.

아쉽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후회되지는 않았다. 마터호른이 이미 내 마음을 가득 채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루체른, 또 다른 알프스를 만나다

세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곳은 루체른이었다.

2년 전 취리히를 잠시 여행했을 때는 그토록 기대했던 알프스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런데 루체른은 달랐다.

도시 전체가 알프스에 부드럽게 둘러싸여 있었다.

루체른 호수와 로이스강, 그리고 그 너머로 이어지는 눈 덮인 산맥은 도시와 자연이 가장 아름답게 어우러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카펠교를 천천히 걸으며 오래된 목조다리의 세월을 느껴 보았다. 다리 아래로는 맑은 로이스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강변에는 작은 장터가 열려 있었다.

우리는 막 짜낸 사과주스 한 잔을 사 들고 강가를 걸었다. 차갑고 달콤한 사과 향이 여행의 피로를 씻어 주는 듯했다.

루체른 호숫가에 서서 알프스를 바라보았다. 호수를 둥글게 감싸 안은 완만한 산줄기들은 마치 한 권의 화보집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다웠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눈 덮인 알프스가 시야를 채웠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도시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매일 아침 이런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체르마트에서 며칠 더 머물고 싶었던 마음과 함께, 루체른 역시 오래 머물며 살아 보고 싶은 도시라는 생각이 조용히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웠던 한 그릇의 따뜻함

카펠교와 루체른 시가지를 천천히 둘러본 뒤 우리는 리기산으로 향하기 전 점심 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그날은 스위스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한식을 먹는 날이었다.

스위스의 높은 물가를 생각하면 여행 일정 중 한식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두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김치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이 차려졌다.

김치된장찌개라는 이름이 조금은 낯설었다. 김치찌개도 아니고 된장찌개도 아닌, 두부와 김치, 그리고 된장을 함께 풀어 끓여낸 국이었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특별한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주일 가까이 빵과 치즈, 스위스 음식을 먹으며 지냈던 우리에게는 그 따뜻한 국물 한 숟갈이 집으로부터 건너온 작은 위로처럼 느껴졌다.

매콤한 제육볶음도 유난히 맛있었다. 평소에는 삼겹살을 담백하게 구워 먹는 것을 더 좋아해 양념한 제육볶음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행지에서는 그 익숙한 한국의 맛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모두가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비싼 스위스 물가 속에서 여행사 일정에 한 번뿐이었던 한식이 왜 그토록 소중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조용했던 유럽의 거리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다시 루체른 시내를 천천히 걸었다. 상점을 둘러보고 기념품도 구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문득 이상한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지임에도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유럽을 여행하면 어느 도시를 가든 중국인 단체 여행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광장에서도, 박물관에서도, 유명 관광지에서도 늘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스위스 여행은 달랐다. 공항도 한산했고 거리 역시 예상보다 훨씬 조용했다.

코로나19는 사람들의 여행 방식뿐 아니라 도시의 분위기까지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 변화는 관광객인 우리보다 현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행이 아닌 삶의 이야기

버스를 운전해 주시던 폴란드 기사님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게 되면서 당분간 일을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는 여행을 즐기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여행객이 줄어드는 일이 곧 생계와 직결되는 현실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고 있었다.

그제야 중국의 거대한 인구가 세계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관광은 단순히 여행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많은 기사님과 호텔 직원, 식당과 상점,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삶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루체른 호수로 향하며

잠시 후 우리는 루체른 호수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이제부터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건넌 뒤 중간 선착장에서 내려 리기산으로 향하는 등반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잔잔한 호수 위에는 유람선이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호수 위에 비친 햇살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알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유람선에 올라 루체른 호수를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중간 선착장에서 내려 리기산으로 향하는 등반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호수 위에는 제법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겨울 공기는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고, 갑판으로 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따뜻한 실내에 머물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배 안에 자리를 잡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람선이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갈 때마다 루체른 호수는 또 다른 스위스를 보여 주었다. 잔잔한 호수 위로 눈 덮인 알프스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고, 호숫가의 작은 마을들은 마치 동화책 속 한 장면처럼 평화로웠다.

배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를 풍경 속으로 데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한 폭의 그림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 더 가까웠다.

유람선을 타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2등석 객실에만 머물러 있었고, 위층 전망 공간은 이용할 수 없는 줄 알고 내려올 때까지 그곳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선착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 되어서야 다른 여행객들이 자유롭게 위층을 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알고 보니 커피나 음료를 주문하면 누구나 전망 공간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간 모두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루체른 호수를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경험하지 못하기에 다시 찾아올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만날 스위스를 약속하며

유람선은 조용히 선착장에 닿았다. 우리는 다시 배낭을 메고 리기산으로 향하는 등반열차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터호른이 웅장한 알프스의 얼굴이었다면, 루체른은 알프스를 가장 따뜻하게 품고 있는 도시였다. 산과 호수, 오래된 다리와 사람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은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 주었다.

체르마트에서는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작은 존재를 느꼈다면, 루체른에서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스위스였지만 전혀 다른 감동이었다.

짧은 하루였지만 루체른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도시가 되었다. 호숫가를 따라 걷던 시간, 카펠교 위를 스쳐 지나가던 바람, 사과주스의 달콤한 향기, 따뜻한 한식 한 그릇, 그리고 호수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던 유람선까지.

여행의 기억은 언제나 거대한 풍경만으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순간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장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는다.

언젠가 다시 스위스를 찾게 된다면, 나는 루체른 호숫가 벤치에 조용히 앉아 하루를 보내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도시. 그저 알프스를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곳.

루체른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여행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를 다음 이야기로 천천히 이끌어 갔다.



작가노트 

루체른은 화려함으로 기억되는 도시가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쉬게 해 준 도시였습니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잠시 멈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루체른은 제게 그런 쉼을 선물해 준 도시였습니다.


호수와 산이 함께 있는 도시

루체른(Luzern)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호수가 생각납니다.

도시 한가운데로 잔잔한 물이 흐르고, 그 너머로 알프스의 산들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높은 산을 찾아 힘들게 올라가지 않아도 도시의 거리에서 고개만 들면 자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루체른 호수는 우리에게 흔히 ‘루체른 호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식으로는 피어발트슈테터호(Vierwaldstättersee), 즉 ‘네 숲의 주(州)의 호수’라 불립니다.

호수의 굽이굽이 이어지는 물길 주변으로 산과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 줍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 호수를 품고 있는 것 같고, 또 어느 순간에는 호수가 산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행 중에는 늘 다음 장소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까지 바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루체른에서는 이상하게 서두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호수 가까이에 서서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한 장면이 충분히 완성되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을 건너는 카펠교

루체른의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펠교(Kapellbrücke)입니다.

로이스강 위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오래된 목조 다리는 루체른을 대표하는 풍경이 되었습니다.

다리를 걸으면 도시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는 짧은 시간이지만, 오래된 나무 아래를 걷고 있으면 마치 오늘에서 과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넜을 것입니다.

장을 보러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족을 만나러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지금의 우리처럼 먼 나라에서 찾아온 여행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1993년 큰 화재로 다리의 상당 부분이 손상되었지만 다시 복원되어 오늘날에도 루체른의 일상 속에 남아 있습니다.

오래된 것을 무조건 새것으로 바꾸는 대신 상처 입은 역사를 기억하면서 다시 이어 가는 모습도 루체른이라는 도시와 잘 어울렸습니다.


골목 안에 남아 있는 오래된 루체른

카펠교를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가면 루체른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작은 광장과 골목들이 이어지고 오래된 건물의 벽에는 그림과 장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상점과 카페가 자리하고 사람들이 평범한 하루를 살아갑니다.

스위스의 오래된 도시들을 여행하며 마음에 들었던 것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래된 건물은 관광객에게 보여 주기 위한 배경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건물 앞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고, 오래된 광장 한쪽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십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간이란 과거를 지워 버리고 앞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오래된 것 위에 오늘의 삶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사의 사자 앞에서

루체른에서 만난 풍경 가운데 호수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 곳이 빈사의 사자상(Löwendenkmal)이었습니다.

바위 벽에 새겨진 커다란 사자는 힘차게 포효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상처를 입고 조용히 마지막 순간을 견디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기념비는 프랑스 혁명 당시인 1792년, 파리 튈르리 궁전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스위스 근위병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역사를 모르고 보아도 사자의 표정에서는 깊은 슬픔이 느껴집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름다운 것만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도시가 기억하고 있는 아픔과 희생을 만나기도 합니다.

루체른의 잔잔한 호수를 바라본 뒤 이 사자 앞에 서 있으니 아름다움과 슬픔이 한 도시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호수 위에 내려앉은 알프스

다시 호숫가로 돌아오면 멀리 산이 보였습니다.

알프스는 체르마트에서 보았던 것처럼 거대한 모습으로 눈앞을 가득 채우지 않았습니다.

루체른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모습이 오히려 편안했습니다.

산을 정복하거나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만 알프스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숫가에 앉아 멀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물 위로 빛이 흔들리고 그 뒤로 산의 윤곽이 이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알프스에도 여러 얼굴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마터호른이 사람을 압도하는 장엄한 알프스였다면, 루체른에서 만난 알프스는 지친 여행자를 조용히 쉬게 해 주는 산이었습니다.


여행에도 쉼표가 필요했습니다

여행을 떠나면 우리는 자꾸 많이 보려고 합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라는 생각에 하나라도 더 보고, 한 장이라도 더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아름다운 곳에 있으면서도 다음 일정부터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루체른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호숫가를 천천히 걷고, 오래된 다리를 건너고, 마음에 드는 골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여행에도 음악처럼 쉼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악에서 쉼표는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앞의 음을 마음에 남겨 두고 다음 음을 기다리게 하는 시간입니다. 때로는 소리가 나는 순간보다 그 짧은 침묵이 음악을 더 깊게 만들기도 합니다.

여행도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계속 움직이고 새로운 것을 보는 것만이 여행은 아닙니다. 잠시 멈춰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눈앞의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시간도 여행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루체른 호수 위에 머문 시간

지금 다시 루체른을 떠올리면 특별히 화려한 한 장면보다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던 편안함이 먼저 생각납니다.

잔잔한 호수와 오래된 카펠교, 골목과 광장, 그리고 멀리 도시를 바라보고 있던 산들.

그곳에서는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는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고, 다시 익숙한 속도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도시는 마음속에 작은 쉼터 하나를 남겨 놓습니다.

힘들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그곳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내게 루체른은 그런 도시로 남았습니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잠시 멈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루체른 호수 앞에서 나는 어디론가 더 빨리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요한 물 위에는 내가 지나온 알프스의 시간도 함께 머물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

루체른은 그렇게 제게 여행 속의 작은 쉼표 하나를 선물해 준 도시였습니다.

루체른은 화려함으로 기억되는 도시가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쉬게 해 준 도시였습니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잠시 멈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루체른은 제게 그런 쉼을 선물해 준 도시였습니다.


Book Quote

"아름다운 풍경은 눈으로 남지만, 평안했던 시간은 마음에 남는다."


여행자를 위한 루체른 안내

스위스 중부에 자리한 루체른(Luzern)은 호수와 알프스, 오래된 도시의 풍경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루체른 호숫가에 자리한 구시가지는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도시를 흐르는 로이스강(Reuss)을 중심으로 오래된 다리와 광장, 골목들이 이어진다.

베른이나 체르마트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지닌 루체른은 크지 않아 천천히 걸어서 여행하기 좋다. 호숫가를 걷다가 구시가지로 들어서고, 카펠교를 건너 작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멀리 알프스의 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와 호수, 산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의 풍경처럼 이어지는 것이 루체른의 가장 큰 매력이다.


루체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명소

1. 카펠교 · Kapellbrücke
루체른을 상징하는 목조다리다. 로이스강을 가로지르는 카펠교와 팔각형 수탑은 루체른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 가운데 하나다.

다리 내부에는 오래된 삼각형 그림들이 이어져 있어 단순한 다리를 넘어 루체른의 역사와 이야기를 품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1993년 큰 화재로 다리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복원되어 오늘날 다시 루체른의 상징으로 여행자들을 맞고 있다.

2. 루체른 구시가지 · Altstadt Luzern
카펠교를 건너면 오래된 건물과 작은 광장, 벽화로 장식된 건물들이 이어지는 구시가지를 만날 수 있다.

화려한 명소만 찾아가기보다 좁은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건물의 벽화와 창문, 작은 상점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중세도시의 흔적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3. 빈사의 사자상 · Löwendenkmal
바위벽에 새겨진 거대한 사자 조각으로 루체른을 대표하는 역사적 기념물이다.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튈르리 궁전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스위스 근위병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상처 입은 채 쓰러져 있는 사자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슬픔과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4. 루체른 호수 · Vierwaldstättersee
루체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호수 풍경이다. 우리에게는 흔히 루체른 호수라고 불리지만 독일어 이름은 피어발트슈테터제(Vierwaldstättersee)다.

잔잔한 호수 뒤로 알프스의 산들이 겹겹이 이어지는 모습은 루체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호숫가를 천천히 걷거나 유람선을 타고 도시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5. 무제크 성벽 · Museggmauer
루체른의 옛 방어시설로 남아 있는 중세 성벽이다. 구시가지와 함께 루체른이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임을 보여 주는 장소다.


루체른에서 맛보는 스위스의 한 끼

Wirtshaus Taube Luzern

루체른 구시가지에 자리한 스위스 음식점이다. 화려한 현대식 레스토랑보다는 오래된 루체른의 분위기 속에서 편안하게 현지 음식을 맛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잘 어울린다.

스위스 여행에서는 치즈 퐁뒤와 라클렛도 유명하지만 지역마다 다른 전통요리를 경험해 보는 재미도 있다. 루체른에서는 크림소스를 곁들인 고기와 버섯 등을 페이스트리와 함께 내는 루체른식 요리인 루체르너 슈겔리파스테테(Luzerner Chügelipastete)도 알려져 있다.

구시가지 산책을 마친 뒤 오래된 스위스 도시의 분위기 속에서 따뜻한 음식을 맛보며 쉬어가기 좋다.

주소 : Burgerstrasse 3, 6003 Luzern, Switzerland


빈사의 사자상을 본 뒤 커피 한 잔

HEINI am Löwenplatz

빈사의 사자상과 가까운 뢰벤플라츠에 자리한 루체른의 카페 겸 제과점이다. 루체른을 걷다가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며 잠시 쉬어가기 좋다.

HEINI에서는 직접 만든 제과류와 초콜릿, 프랄린 등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아침식사와 가벼운 식사도 가능해 여행 중 편하게 들르기 좋은 곳이다.

빈사의 사자상에서 느꼈던 묵직한 여운을 안고 루체른의 거리를 조금 더 걸은 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은 여행의 시간이 된다.

주소 : Zürichstrasse 12, 6004 Luzern, Switzerland


루체른 여행 TIP

루체른은 주요 명소가 비교적 가까이 모여 있어 도보 여행이 잘 어울리는 도시다. 카펠교를 건너 구시가지를 걷고, 빈사의 사자상을 둘러본 뒤 호숫가로 돌아오는 동선으로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루체른 호수 유람선과 주변 산악지역 여행을 함께 계획해 볼 수 있다. 도시에서 바라보던 알프스를 호수 위에서 다시 바라보면 루체른의 풍경이 또 다르게 다가온다.


Next Story

다음 이야기에서는 리기산, 유럽의 여왕이라 불리는 산에서 만난 가장 평화로운 알프스를 함께 걸어갑니다. 호수와 산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순간, 스위스 여행의 또 다른 감동이 이어집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