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그리던 그린델발트

꿈속에서 그리던 그린델발트

지난번 여행에서 들르지 못했던 그곳.
그 아름답고 가장 알프스다운 산속 마을, 그린델발트에 드디어 왔다.

세계적인 알프스의 봉우리들과 목가적인 산골 풍경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곳.

그 마을을 찾아가기까지 비 내리는 산길을 버스는 헉헉대며 올라갔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서도 과연 저 산 너머에는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마을 입구에서 처음 마주한 풍경은 그 모든 고생스러운 시간을 단숨에 잊게 할 만큼 환상적이었다.


비와 물안개 속의 알프스

비가 내리는 산기슭에는 하얀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숨어 버리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에는 하얀 만년설이 덮여 있었다.

맑은 날의 알프스가 푸른 하늘 아래 장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비 오는 날의 알프스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산은 안개 속에 반쯤 몸을 감추고 있었고, 구름은 산허리를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한동안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사진으로 보고 책으로 읽으며 마음속에 그려 왔던 그린델발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지난 여행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곳이라 더욱 애틋했다.

한 번의 여행에서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인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풍경은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언니와 함께 맞이한 산속의 밤

그린델발트에서 또 하나의 알프스의 밤을 맞았다.

언니는 연신 너무 좋다며 카메라를 눌렀다.

“정말 좋다.”

언니의 그 말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나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찍는 것보다 한동안 가만히 서서 소리를 듣고 싶었다.

어디선가 나지막한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비 내리는 소리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산속의 고요와 섞이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예전에 알프스에서 들었던 노래와는 또 다른 노래였다.

맑은 햇살 아래 초원을 달리던 알프스의 노래도 아니었고, 마터호른 앞에서 가슴 벅차게 들었던 장엄한 노래도 아니었다.

비 내리는 그린델발트가 들려주는 노래는 조용하고 깊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산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아직 융프라우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다음에는 융프라우를 만나러 가야 했다.

아직 그 높은 곳에 올라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이미 알프스를 다 가진 사람처럼 풍요로웠다.

산을 정복해야 알프스를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꼭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만 그 산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 아래 작은 마을에 서서 안개에 싸인 봉우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비 냄새를 맡고, 폭포 소리를 듣고, 언니와 나란히 서서 같은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살면서 언제 또 이 아름다운 알프스를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풍경 하나하나가 더욱 귀하게 다가왔다.

나는 눈으로만 보지 않으려고 했다.

산의 모습도, 공기의 냄새도, 빗소리도, 언니의 목소리도 마음속에 오래 담아 두고 싶었다.


꿈속 같은 그린델발트

조금씩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낮 동안 물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기를 반복하던 산들도 서서히 저녁빛 속으로 들어갔다.

만년설 위로 알프스의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마을의 집들도 하나둘 저녁을 맞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려 왔던 알프스를 생각했다.

첫 번째 여행에서 만나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았던 그린델발트.

그래서 어쩌면 더 오래 기다렸고, 더 많이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날에는 비가 내렸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비마저 좋았다.

비가 아니었다면 산기슭을 감싸고 흐르는 저 아름다운 물안개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맑은 날이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또 하나의 알프스를 나는 그날 만났다.

언니는 여전히 카메라에 그린델발트를 담고 있었고, 나는 폭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알프스의 노래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살면서 언제 또 이 풍경 앞에 설 수 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괜찮았다.

아직 융프라우에 오르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프스를 다 가진 부자였으니까.

어둠이 내려오는 알프스.

만년설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산의 그림자.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언니와 함께 맞이한 또 하나의 밤.

그날의 그린델발트는 오래전부터 꿈속에서 그려 온 알프스가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작가노트 

오래 기다려 만난 그린델발트

그린델발트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알프스의 마을이었습니다.

첫 번째 스위스 여행에서도 알프스를 만났지만 그린델발트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난 뒤에도 마음 한편에는 그곳에 대한 작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서 바라보던 그린델발트는 제가 어린 시절부터 상상했던 알프스와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높은 설산 아래 초록빛 들판이 펼쳐지고, 산비탈을 따라 작은 집들이 자리 잡은 풍경. 언젠가는 꼭 그곳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알프스 여행에서 마침내 그 꿈속의 마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가 내려서 더 아름다웠던 날

그린델발트로 들어가던 날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버스는 비 내리는 산길을 힘겹게 올라갔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흐릿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곳인데 날씨가 맑지 않아 처음에는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가까이 들어섰을 때 그런 마음은 금세 사라졌습니다.

산기슭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사이로 만년설을 머리에 인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산은 한꺼번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안개 사이로 조금씩 나타났다가 다시 숨어 버렸고, 구름은 산허리를 천천히 감싸며 흘러갔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아름다웠습니다.

첫 번째 여행에서 보았던 알프스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던 산이 아니라, 비와 안개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알프스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가 기대했던 날씨와 풍경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날을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린델발트에서는 알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날에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것을.

그날의 물안개와 젖은 산길, 구름 사이로 보이던 만년설은 맑은 날이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또 하나의 알프스였습니다.


언니와 함께 바라본 알프스

이번 여행에서 그린델발트가 더욱 특별했던 것은 언니와 함께였기 때문입니다.

언니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너무 좋다”고 말하며 카메라를 눌렀습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바라보다가 다시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같은 풍경 앞에서도 사람마다 그것을 마음에 담는 방법은 다른가 봅니다.

언니가 카메라에 알프스를 담고 있을 때 나는 그곳의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폭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빗소리와 물소리 사이로 들려오던 그 소리는 마치 산이 부르는 노래처럼 느껴졌습니다.

첫 번째 알프스 여행을 마치고 나는 그곳에서 들었던 마음의 소리를 『알프스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찾아온 알프스는 이전과 똑같은 노래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마터호른에서 들었던 노래가 벅차고 장엄했다면, 그린델발트에서 들은 노래는 낮고 조용했습니다.

비가 내리고 물안개가 흐르는 저녁, 언니와 함께 서서 들었던 그 소리는 오래된 자장가처럼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알프스를 다 가진 부자

그날 나는 아직 융프라우에 올라가 보지도 않았습니다.

여행의 중요한 일정은 아직 남아 있었고, 더 높은 곳에서 만나게 될 알프스의 풍경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린델발트의 저녁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미 알프스를 다 가진 부자가 된 것 같다고.

그 말은 좋은 곳을 많이 보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보고 싶어 했던 풍경 앞에 서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이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여행지에 가면 무엇을 보았는지,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녀왔는지가 중요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여행을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도 좋고, 비가 내려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여행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갖는 일이 아니라, 내 앞에 주어진 한순간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속에서 그리던 마을

저녁이 되자 알프스에 천천히 어둠이 내려왔습니다.

만년설을 덮은 봉우리 위에도 그림자가 내려앉고, 산기슭을 떠돌던 물안개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살면서 언제 또 이 아름다운 알프스를 볼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의 풍경이 더욱 소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압니다.

다시 가지 못한다고 해서 그 풍경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떤 장소는 여행이 끝난 뒤 비로소 우리 안에 오래 머물기 시작합니다.

그린델발트도 내게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비 내리는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 처음 마주했던 물안개, 만년설을 머리에 인 알프스의 봉우리, 카메라를 들고 연신 좋다고 말하던 언니,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들려오던 나지막한 폭포 소리.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첫 번째 여행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그린델발트를 나는 두 번째 알프스 여행에서야 만났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름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기다린 풍경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나게 되니까요.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그리던 그린델발트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융프라우에 오르지도 않은 채, 이미 알프스를 다 가진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