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에 간 하이디
긴 겨울밤을 지나 마침내 마터호른을 향해 달려가던 아침. 체르마트는 알프스를 만나기 전, 가장 설레는 기다림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벽이 열어 준 하루
어둠 속에서 말똥말똥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생각의 숲을 헤매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긴 밤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아침이 찾아왔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체르마트(Zermatt)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밖의 공기는 차갑게 얼굴을 스쳤고, 역사 안에는 스위스의 겨울 아침 특유의 맑고 서늘한 공기가 가득했다.
급하게 모자를 하나 살까 하여 역 안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가격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고, 마음에 드는 모자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빈손으로 기차에 올랐다.
언니는 호텔에서 마신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역사에서 3프랑을 주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사 왔다. 그 작은 종이컵 하나가 추운 아침을 조금은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키가 일상이 되는 사람들
체르마트행 열차 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겨울 스키 시즌이라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스키복을 입고 스키 장비를 들고 있었다.
관광객이라기보다 생활인들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출근하듯 자연스럽게 스키를 메고 열차에 올랐고, 누군가는 아이의 장비를 챙기며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가이드는 이 지역에서는 스키가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라고 설명했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스키를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떠올랐다. 책 속에서만 존재하던 알프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오늘도 삶을 이어가는 진짜 알프스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자동차가 없는 마을, 체르마트
테쉬에서 약 10여 분을 달리자 체르마트 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으로 나오자 작은 전기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 일반 자동차의 출입을 제한하는 마을이다. 조용한 전기차만이 골목을 오가며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덕분에 마을에는 자동차 소음 대신 사람들의 발걸음과 종소리, 그리고 겨울 바람 소리만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에 포근히 안긴 체르마트는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조용했다. 붉은 지붕과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눈 덮인 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오후에 고르너그라트 등반열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기에 오전 시간을 이용해 체르마트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
체르마트는 크지 않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오랜 역사와 현대적인 편의시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마을 끝에 있는 작은 성당에 올라 바라본 마터호른은 아직도 멀리 있었지만 이미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골목마다 걸음을 멈추며 사진을 찍고,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우리는 스위스 마트인 쿱(COOP)에도 들렀다.
그뤼에르에서 샀던 치즈와 똑같은 제품이 훨씬 저렴한 가격에 진열되어 있었다. 몇 개 더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여행 마지막까지 들고 다닐 짐을 생각하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알프스 정상에서 먹을 초콜릿만 몇 개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점심으로 나온 닭다리 구이와 따뜻한 야채, 그리고 녹인 치즈는 예상보다 훨씬 든든했다. 정통 퐁듀는 아니었지만 치즈에 야채를 찍어 먹으며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다. 우리 앞에는 고르너그라트 등반열차가 조용히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알프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알프스가 열리는 순간
등반열차는 천천히 체르마트를 떠났다. 창밖으로 보이던 작은 마을은 조금씩 멀어지고, 열차는 하얀 눈으로 덮인 알프스의 품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높이를 더할수록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나무 사이로 보이던 설경은 어느새 끝없이 펼쳐진 은빛 세상이 되었고, 산과 하늘의 경계마저 희미해질 만큼 눈부신 풍경이 이어졌다. 열차 안 여기저기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멀리서 하나의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마터호른(Matterhorn)이었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산. 마터호른은 한 시간 가까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열차가 굽이굽이 산길을 오를 때마다 어느 순간은 가까워지고, 어느 순간은 산 뒤로 숨어 버렸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알프스가 조금씩 자신을 보여 주며 우리를 정상으로 초대하는 듯했다.
관광객의 열차, 주민들의 삶
등반열차는 중간중간 작은 산골 마을에 멈춰 섰다. 창밖을 바라보니 깊은 계곡과 가파른 산비탈 사이에도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떻게 저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지만, 역에 도착할 때마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은 관광객이 아니었다. 이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이었다.
역을 나선 사람들은 넓은 도로도 없는 산허리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 내려갔다. 눈 덮인 비탈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모습은 이곳에서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제야 아침 기차 안에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스키복을 입고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스키는 겨울 스포츠가 아니라 생활이었다. 눈이 내리면 그것이 곧 길이 되었고, 스키는 가장 익숙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평생 한 번 탈까 말까 한 관광열차였지만, 그들에게 이 열차는 학교로 가는 길이었고, 직장으로 향하는 길이었으며,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삶을 이어 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절약이라는 삶의 방식
문득 테쉬 호텔에서 만났던 주인장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아침 식사 때 커피를 한 잔씩만 따라 주시던 모습이 처음에는 조금 인색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높은 산속까지 모든 물자를 운반해야 하는 환경. 눈과 추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절약이 몸에 배었을 것이다. 그것은 인색함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오래된 생활의 지혜였다.
우리가 여행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프스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감동
열차는 마지막 구간을 향해 힘차게 올라갔다. 창밖에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설산이 펼쳐졌고, 계곡 사이사이에는 작은 마을들이 장난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언제나 마터호른이 있었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나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 읽었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떠올랐다. 산등성이 어디쯤에서 하이디와 피터가 양들을 몰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동화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우리 모두는 잠시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열차는 고르너그라트 정상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알프스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마터호른과의 첫 만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터호른 앞에서 멈춘 시간
등반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우리는 모두 말을 잃었다.
눈앞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알프스의 설산이 펼쳐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자태로 마터호른이 우뚝 서 있었다. 수없이 사진으로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마터호른은 사진 속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차가운 공기는 폐 깊숙이 스며들 만큼 맑았고, 눈 덮인 산맥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 풍경 앞에서는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자연이 들려주는 침묵이 우리 모두를 조용히 바라보게 만들었다.
가이드는 웃으며 말했다.
"이번 여행팀은 모두 삼대는 덕을 쌓고 오신 것 같습니다."
그는 이곳을 여러 번 안내했지만 이렇게 선명한 마터호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불과 며칠 전 팀은 날씨가 좋지 않아 산에 오르지도 못했고, 체르마트역에서 흐릿한 마터호른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은 채 돌아갔다고 했다.
겨울의 스위스는 원래 눈과 비가 잦고 흐린 날이 많다. 특히 2월은 변화가 심한 계절이라 맑은 하늘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은 달랐다. 공항에 도착한 첫날 밤 잠시 비가 내린 것을 제외하면 여행 내내 푸른 하늘이 이어졌다. 알프스도, 마터호른도, 호수도 모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 주었다.
가이드는 웃으며 말을 고쳤다.
"아니, 삼대가 아니라 사대는 덕을 쌓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정말 감사한 선물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앞에서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프스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과 새하얀 설원, 그리고 그 중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마터호른.
그 거대한 자연 앞에 서 있으니 평소에는 크게만 보였던 나의 걱정과 욕심이 너무도 작게 느껴졌다.
'이 대자연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한없이 평안해졌다. 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바쁘게 달려왔던 시간들, 아등바등 살아가며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잠시 내려놓아졌다.
알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산은 우리에게 쉼을 주었고, 하늘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무언가를 결심하려 하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계획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자연이 허락한 평안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전망대 카페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마터호른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커피는 아마 여행 중 가장 값비싼 한 잔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알프스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여유는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가끔은 우리가 살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전혀 다른 세상에 자신을 맡겨 보는 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은 삶을 바꾸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을 조용히 채워 주는 쉼이었다.
우리 모두는 하이디가 되었다
이번 여행에 함께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알프스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여행 내내 누구 하나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버스 좌석도 첫날 앉은 자리를 끝까지 지킬 만큼 서로를 배려했고, 작은 불편도 웃으며 넘겼다.
언제나 일행을 먼저 살피던 프린세스 가족, 순천에서 온 오누이 대학생, 울산에서 온 어머니와 딸, 일산에서 온 시흥이네 가족….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알프스 앞에서는 모두 같은 마음이 되었다.
눈을 뭉쳐 던지며 웃고, 눈밭에 몸을 던져 아이처럼 즐거워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행복해하던 모습. 그 순간만큼은 나이도 직업도 삶의 무게도 모두 내려놓았다.
우리 모두는 잠시 어린 시절의 하이디가 되어 있었다.
석양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던 마터호른은 마지막까지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지만 알프스는 마치 그 순간만은 영원히 멈춰 있는 듯했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거대한 산이 아니다. 그 산 아래에서 작아졌던 나 자신, 그리고 그 작은 존재를 따뜻하게 품어 주던 알프스의 품이다.
그래서 여행은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터호른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겨울의 노래로 조용히 남아 있다.
작가노트
알프스는 높은 산을 보여 준 여행이 아니라,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 여행이었습니다.
마터호른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과 평안은 시간이 흘러도 제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알프스에 간 하이디」는 어린 시절의 동경을 지나 알프스의 품 안에서 함께 하이디가 되어 그곳을 누빈 사람들과 따뜻한 차를 나누며, 알프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처음 만난 알프스
내가 알프스를 처음 만난 것은 여행을 떠나기 훨씬 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속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이 있었습니다.
높은 산과 푸른 초원,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산양과 목동, 알름 할아버지의 오두막집. 그 모든 것은 어린 내게 현실이라기보다 아름다운 동화 속 세상에 가까웠습니다.
하이디가 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갔을 때 왜 그토록 알프스를 그리워했는지 어린 시절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집에서 지내고 클라라라는 좋은 친구도 만났는데 왜 다시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을까.
세월이 흐르고 내가 직접 알프스에 서고 나서야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알프스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동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그뤼에르에서 멀리 알프스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 한편에서는 오래전 읽었던 하이디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체르마트로 향하는 기차에서는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스키복을 입고 장비를 들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길을 오가는 일이 관광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기차가 고도를 높여 갈수록 작은 마을은 멀어지고 창밖에는 끝없이 설산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터호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던 산이었지만 실제로 바라보는 순간에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책에서만 존재하던 알프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마터호른 앞에서 작아진 마음
마터호른 앞에 서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을 줄이게 됩니다.
거대한 산맥과 눈부신 설원, 푸른 하늘 아래 홀로 우뚝 솟은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사람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아주 작게 느껴졌습니다.
평소에는 크게만 보였던 걱정도, 꼭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그 앞에서는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산과 계곡, 수없이 많은 세월을 견디며 그 자리를 지켜 온 설산을 바라보면서 경외감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평안을 느꼈습니다.
무언가를 더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모두 하이디였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마터호른만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이 눈밭에서 웃고 뛰어다니던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달랐으며 여행을 떠나오기 전까지는 서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알프스의 눈밭에 서자 모두 아이가 되었습니다.
눈을 뭉쳐 던지고, 눈밭에 몸을 던져 사진을 찍고,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주며 웃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나이도 직업도 일상에서 짊어지고 온 삶의 무게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책 속에서 보았던 하이디가 되어 우리 모두 알프스의 품을 누비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여행이 사람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잠시 어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알프스에서 나눈 따뜻한 차 한 잔
차가운 설산을 바라보며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도 그날에는 특별했습니다.
손을 녹이며 함께 앉아 조금 전 보았던 풍경을 이야기하고, 창밖의 산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여행에서 이런 시간은 사진으로는 제대로 남길 수 없습니다.
따뜻한 찻잔의 온기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창밖에 펼쳐져 있던 새하얀 산, 잠시 아무 말 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시간.
그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여행의 기억이 됩니다.
높은 산을 정복하기 위해 알프스에 온 것이 아니라 그 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온 사람들처럼 우리는 오래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이디가 그리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알프스를 다녀온 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생각하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이 듭니다.
하이디가 그리워했던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산과 초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알름 할아버지가 있었고, 피터와 산양들이 있었으며,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자연과 자신이 가장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의 좋은 집에서도 하이디의 마음은 끊임없이 산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도 그런 곳이 하나쯤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자신으로 존재해도 괜찮은 곳.
내게 알프스는 잠시 그런 곳이 되어 주었습니다.
알프스가 가르쳐 준 것
여행을 떠날 때 나는 아름다운 알프스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마음에 남은 것은 아름다운 산의 모습만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멈추어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많이 가지는 것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을 온전히 누리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알프스는 높은 산을 보여 준 여행이 아니라,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 여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난 뒤에도 알프스는 내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터호른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과 평안은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의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삶이 바빠질 때면 가끔 그 겨울의 알프스를 떠올립니다.
새하얀 산과 푸른 하늘, 함께 웃었던 사람들, 손안에 들고 있던 따뜻한 찻잔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알프스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하이디가 산길을 달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잠시 하이디가 되어 알프스를 누비던 우리들의 웃음소리도 함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알프스는 높은 산을 보여 준 여행이 아니라,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 여행이었습니다
.마터호른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과 평안은 시간이 흘러도 제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알프스에 간 하이디는 어린 시절의 동경을 지나 알프스의 품 안에서 함께 하이디가 되어 알프스의 품속을 누빈 사람들과 따뜻한 차를 나누며 알프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Book Quote
"여행은 세상을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조금 더 넓어지는 일이다."
여행자를 위한 체르마트 안내
스위스 발레주 남쪽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한 체르마트(Zermatt)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마터호른(Matterhorn)을 품고 있는 산악마을이다.
해발 약 1,600m에 자리한 마을은 높은 알프스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있다. 좁은 골목과 오래된 목조주택, 작은 호텔과 상점 사이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건물 너머로 마터호른의 뾰족한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체르마트에서는 일반 자동차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어 마을 안에서는 전기차와 도보가 주요 이동수단이다. 덕분에 세계적인 관광지임에도 산악마을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테쉬(Täsch)에서 체르마트까지는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차가 산골짜기를 따라 체르마트역에 가까워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알프스의 풍경도 점점 깊어진다.
체르마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
1. 마터호른 · Matterhorn
해발 4,478m의 마터호른은 스위스를 상징하는 산이다. 독특하게 솟아오른 피라미드 형태의 봉우리 때문에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날씨가 맑은 날 아침에는 체르마트 마을에서도 마터호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햇빛이 산 정상부터 서서히 비추기 시작하는 순간은 체르마트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하나다.
2. 고르너그라트 · Gornergrat
체르마트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대표적인 전망대다. 해발 3,000m가 넘는 높이에서 마터호른을 비롯해 알프스의 수많은 봉우리와 빙하를 바라볼 수 있다.
산악열차를 타고 천천히 고도를 높이며 올라가는 과정 자체도 하나의 여행이다. 창밖으로 숲과 설원, 높은 봉우리들이 차례로 나타나며 체르마트에서 바라보던 알프스와는 또 다른 장대한 풍경을 보여 준다.
3. 마터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 Matterhorn Glacier Paradise
케이블카를 이용해 올라갈 수 있는 고산 전망지역이다. 높은 곳에서 빙하와 주변 알프스 산맥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스위스를 넘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쪽 알프스까지 펼쳐지는 장대한 산악 풍경을 만날 수 있다.
4. 체르마트 구시가지 · Hinterdorf
화려한 산악리조트로 알려진 체르마트에도 옛 산촌의 모습이 남아 있다. 힌터도르프 주변에서는 검게 그을린 오래된 목조 곡물창고와 전통 가옥을 볼 수 있다.
현대적인 호텔과 상점 사이에 남아 있는 오래된 목조건물들을 바라보면 체르마트가 오래전부터 알프스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마터호른을 바라보며 맛보는 스위스 음식
Saycheese!
체르마트 중심의 Grand Hotel Zermatterhof 안에 있는 스위스 전통 치즈요리 전문 레스토랑이다. 현지 치즈를 사용한 퐁뒤와 라클렛 등 스위스를 대표하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알프스 산악지역에서 치즈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긴 겨울을 지내기 위해 우유를 오래 보관하는 방법에서 발달한 치즈문화는 스위스 산악지방 사람들의 생활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따뜻하게 녹인 치즈를 빵과 함께 먹는 퐁뒤 한 냄비에는 알프스 목초지와 젖소, 산촌 사람들의 오래된 생활문화가 함께 담겨 있다.
위치 : Grand Hotel Zermatterhof, Bahnhofstrasse 55, 3920 Zermatt, Switzerland
체르마트에서 커피 한 잔
Zermatt Kaffee Rösterei
체르마트에서 시작된 로컬 커피 로스터리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커피를 만들며 알프스 산악마을에서 조금 특별한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다.
체르마트에서는 바쁘게 명소만 찾아다니기보다 산책 도중 잠시 멈춰 커피 한 잔을 마셔보는 것도 좋다.
창밖에 눈 덮인 산이 보이는 작은 공간에 앉아 따뜻한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있으면 조금 전까지 올려다보았던 거대한 알프스가 한결 가까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체르마트 여행 TIP
체르마트의 산악 전망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마터호른은 구름에 가려지면 짧은 시간 안에도 모습을 감출 수 있어 날씨가 맑을 때는 일정을 미루지 않고 전망대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
고르너그라트나 마터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처럼 해발고도가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는 체르마트 마을보다 기온이 크게 낮아질 수 있다. 계절과 관계없이 따뜻한 겉옷과 미끄럽지 않은 신발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체르마트에서는 조금 천천히 걸어보자. 골목 사이로 마터호른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작은 목조건물 뒤로 설산이 펼쳐지는 순간들이 체르마트 여행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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