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새암|내 어머니의 샘
어머니는 샘이다.
태곳적부터 흘러와서 우리를 낳고 기르시고 먹이고 입히시며 온갖 정성을 다 쏟으시고 조용히 또 샘물 되어 흘러가신다.
하늘의 부르심으로 엄마가 떠나신 후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특히나 준비되지 못한 이별을 겪으며 영원 안에서 다시 엄마를 만날 소망을 가지면서도, 지금 보이지 않는 엄마의 부재를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다.
갯새암, 내 어머니의 샘.
비록 엄마는 떠나셨지만 이 샘은 여전히 솟아나 흐르고 있다. 차갑고 시원한 샘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이제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함을 느낀다. 언제까지 슬픔 속에 갇혀 주저앉아 있는 나를 엄마가 기뻐하실 리 없다. 이제 그만 일어나 또 담담히 남은 인생길 걸어가라고 이 샘은 나를 등 떠밀고 있다.
그리운 어머니.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엄마가 안 계신다는 것이 이토록 허전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인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인생을 살면서 후회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으랴만, 엄마와의 못다 했던 시간은 아마 일생을 두고 가슴에 슬픔으로 남을 것이다.
작가 노트
어머니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는 샘이었습니다
『갯새암』은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비로소 깨닫게 된 사랑과 기억, 그리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도 따뜻한 샘물 한 모금 같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사랑
사람은 곁에 있을 때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오래 받아 왔기에 그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그랬습니다.
어릴 때 아프면 밤새 곁을 지켜 주시던 일, 학교에서 작은 상이라도 받아 오면 누구보다 기뻐해 주시던 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했다가 남몰래 한 그릇 더 챙겨 주시던 일.
그때는 그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엄마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니 너무나 평범했던 그 순간들이 하나씩 특별한 기억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따뜻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
어머니가 떠난 뒤 나는 자꾸 어린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뜻밖에도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시골집의 부엌과 마당, 식구들이 둘러앉았던 밥상, 아픈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하나씩 기억 속에서 돌아왔습니다.
어떤 기억에는 냄새도 있었습니다.
부엌에서 끓고 있던 국 냄새와 비 오는 날 부쳐 먹던 부침개의 냄새, 여름날 차갑게 먹던 오이냉국과 가지냉국의 맛까지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살아났습니다.
어머니를 기억한다는 것은 거창한 사건을 떠올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밥 한 그릇, 반찬 하나, 따뜻한 손길 하나에 숨어 있던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억을 하나씩 꺼내다 보니 나는 어머니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어머니의 샘, 갯새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작은 샘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솟아나고 사람들이 그 물을 길어 가던 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마음속의 그 샘은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습니다.
『갯새암』이라는 제목을 떠올리며 나는 자꾸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샘은 자신을 위해 물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목이 마르면 물을 내어 주고, 또 누군가 찾아오면 다시 물을 내어 줍니다.
그렇게 주고 또 주면서도 샘에서는 다시 물이 솟아납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몫보다 자식의 몫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이 배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평생을 내어 주셨습니다.
어릴 때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어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나서야 어머니가 내 삶에서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밥상에는 말하지 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갯새암』을 쓰면서 유난히 음식에 관한 기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순히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에 대한 추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음식의 맛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음식을 만들어 주던 사람의 마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픈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한 숟갈 더 먹이고 싶었던 마음,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먹이고 싶었던 마음, 식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배고픔은 뒤로 미루었던 마음이 그 밥상 안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밥을 지으셨고 국을 끓이셨으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어머니의 밥상은 어머니가 평생 우리에게 써 내려간 가장 긴 편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며 다시 살아난 시간
처음부터 한 권의 책을 쓰려고 기억을 꺼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워서 한 장면을 적었고, 또 생각이 나서 다른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렇게 한 편씩 써 내려가다 보니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서로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글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고 젊었던 어머니도 만났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글을 쓴다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억을 문장으로 옮기는 동안 사라질 것 같았던 시간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음속에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어머니와 헤어지는 대신 어머니를 다른 방법으로 내 삶 속에 모시는 법을 조금씩 배워 갔습니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을 다시 건네는 일
시간이 흐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그대로 돌려드릴 수는 없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건넬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내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내어 주셨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문장 하나를 건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 괜찮다고 서둘러 말하기보다 잠시 곁에 앉아 주는 글.
어머니가 그리운 사람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한 번 떠올려 보게 하는 글.
잊고 지냈던 고향과 어린 시절의 밥상을 생각하며 잠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갯새암』이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어머니는 떠나셨지만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내 안에 남아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었고, 힘든 날이면 다시 돌아가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마음의 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갯새암』은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만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 받은 사랑이 어떻게 오랜 세월 그 사람의 삶을 지켜 주는지를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상실을 지나 다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는 자신을 살아가게 한 하나의 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고향의 작은 집이나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았던 따뜻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습니다.
살다 지쳐 목이 마르는 날이면 우리는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받은 사랑 한 모금으로 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내게 그 샘은 어머니였습니다.
평생 내어 주고도 다시 사랑을 길어 올리던 사람.
어머니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아직도 마르지 않는 갯새암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갯새암』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을 축일 수 있는 작은 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물 한 모금이 자신의 삶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흐르고 있었던 사랑을 다시 발견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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