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시골집

 

어머니와 시골집


어디를 가도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던 엄마

엄마는 유난히 시골집을 좋아하셨다.

딸들이 다 시집가고 혼자 시골집에 계시는 것이 안타까워 우리는 가끔씩 엄마를 각자의 집에 며칠이라도 모시고 가려고 했다.

젊은 날 우리를 키우느라 너무 많은 고생을 하신 어머니는 세월과 함께 여기저기 몸이 아프셨다. 특히 다리가 많이 안 좋으셨고 자주 붓고 밤에 푹 주무시지 못할 때가 많으셨다.

당뇨와 고혈압약도 수년째 드시고 계셔 우리는 늘 엄마의 건강이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동생들은 큰 병원에 예약해서 엄마를 진료받게 하려고 가끔씩 모시고 가곤 했다. 그런데 엄마는 어느 곳을 가든 하룻밤 이상은 자지 않으려고 하셨다.

어느 해 동생들이 엄마를 서울로 초대해서 병원 진료도 받고 맛있는 것도 대접한다고 해서 나도 서울에 올라갔다.

인사동의 분위기 좋은 한정식 집에서 만난 우리는 엄마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식사 후 함께 인사동 거리와 청계천을 걸으며 수다를 떨고 서울 구경도 했다.

그런데 동생들은 엄마가 저녁에 김천에 내려가신다고 했다며 푸념을 했다. 며칠 동안 계시며 치료를 받고 갔으면 좋겠는데 하룻밤 이상은 절대 안 주무신다는 거였다.

다른 동생 집에 가셔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을 모시고 싶었던 딸

엄마는 내가 수지침을 놓아 드리면 밤에 푹 자고 부기가 빠져 몸이 가볍다며 좋아하셨다.

그래서 한번은 우리 집에 가서 침도 맞고 온천욕도 매일 하자며 엄마를 모시고 온 적이 있다.

일주일만이라도 집중적으로 치료해 드리고 싶어 모시고 왔는데 엄마는 이틀 만에 다시 김천으로 가셨다.

넓은 아파트에 바로 옆에 온천탕까지 있어서 지내시기에 불편함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는 시골집을 가고 싶어 하셨다.

우리 집이 너무 절간같이 조용해서 적적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일주일간 계신다고 가을추수도 끝내고 짐도 다 챙겨서 오셨는데 이틀 만에 가신다고 해서 속이 상했다.

동생들에게 이번엔 꼭 일주일간 모시고 있겠다고 큰소리치고 왔는데 말이다.

엄마가 오시고 이틀째 되던 날 동생들은 엄마가 아직 우리 집에 계신지 궁금해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이번엔 꼭 일주일간 우리 집에서 치료해 드릴 거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해가 질 무렵 갑자기 아파트가 절간 같다고 시골로 가신다며 역에 태워 달라고 하셨다.

‘아니, 시골집에 꿀단지가 있나….’

아무리 설득해도 막무가내셨다.

할 수 없이 나는 투덜거리면서 엄마를 역에 모시고 가서 기차에 태워 드렸다.

언니에게 전화해서 엄마가 지금 가시니 시간 맞춰 역에 좀 태우러 오라고 부탁했다.

언니는 그럴 줄 알았다며 막 웃었다.

그리고는 엄마는 시골집이 제일 편하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며 나를 달랬다.

엄마가 가시고 동생들에게서 번갈아 전화가 왔다. 그새 언니가 얘기를 했는지 킥킥거리며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나이가 들고서야 알게 된 마음

그때는 참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좋은 곳에 모시고 와도 오래 계시지 못하는지, 왜 딸들이 곁에 있어도 그렇게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어가니 어느 날부터 나도 어디에 가면 빨리 내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에게 집은 단순히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오래 살아온 시간과 습관, 익숙한 냄새와 소리, 마음이 놓이는 자리까지 모두 담겨 있는 곳이었다.

엄마에게 시골집은 그런 곳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좋은 병원에 모시고 가고, 넓은 집에서 편히 쉬게 해 드리고, 온천욕도 시켜 드리면 엄마가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가 정말 편안했던 곳은 장미넝쿨이 자라고, 밭이 있고, 아침이면 익숙한 마을 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 시골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 오려고만 했던 것이 조금 후회된다.

엄마가 계신 시골집에 가서 치료해 드리면 되었는데, 그때의 나는 내가 갈 수 없는 사정만 먼저 생각했다.

어떻게든 내가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볼 생각보다 내가 세워 놓은 계획 안으로 엄마를 모셔 오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좋은 것을 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장 편안해하는 곳과 방식을 존중해 주는 일이기도 했다.

엄마는 어디를 가도 결국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그곳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삶이 있었고, 젊은 날부터 나이 들어 가던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엄마가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은 집 한 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가장 오래 머물러 있던 자리였다는 것을.


작가 노트 

엄마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곳

이 글을 쓰고 나니 오래전 역에서 엄마를 기차에 태워 보내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서운한 맘이 가득했다.. 엄마를 위해 이것저것 계획하고, 치료도 해 드리고, 며칠 편하게 쉬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엄마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날의 엄마가 조금씩 이해된다.

어디를 다녀와도 내 베개가 있는 방에 누우면 마음이 놓이고, 아무리 좋은 곳에서 지내도 며칠이 지나면 집에 가고 싶어지는 나를 보면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에게도 그랬던 것이다.

딸들의 넓고 좋은 집보다 오래 살아온 작은 시골 집이 더 편했고, 좋은 음식보다 자신의 부엌에서 끓여 먹는 밥 한 끼가 더 마음을 놓이게 했을 것이다.

젊은 날에는 사랑하면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병원을 찾아드리고, 편한 곳으로 모셔 오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랑은 때로 그 사람을 내 쪽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 와 치료해 드리려 했던 마음도 사랑이었지만, 그 시절 내가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엄마가 가장 편안해 하던 시골 집으로 내가 찾아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익숙한 방에 엄마를 눕혀 드리고, 시골 집 마루에 앉아 엄마의 손을 잡고 치료해 드렸더라면 엄마는 훨씬 편안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몰랐다.

효도에도 상대방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내가 해 주고 싶은 것보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면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나도 조금씩 그런 나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제 엄마가 왜 그렇게 시골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그 집에는 엄마의 청춘이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이 있었고, 여섯 딸을 키우던 세월이 있었으며, 밭과 마당과 오래된 부엌까지 엄마의 삶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엄마에게 그곳은 단순한 시골 집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그래서 어디를 다녀와도 결국 돌아가야 마음이 놓이는 곳이었다.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한 줄의 기억

그때는 엄마를 내 집으로 모셔 오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고,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내가 엄마의 집으로 가는 것도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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